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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운영/축조

    가마의 운영

    제주 가마의 운영 방식은 육지부 지방과는 달리 개인이 운영하지 않았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공동 운영방식인 '계(契)'로 운영하였다.

    가마 작업을 처음 시작했던 대정읍 신평리, 구억리, 한경면 고산리 지역은 계를 결성하여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후발지역인 애월읍 광령리, 제주시 지역은 개인이 운영을 했다.

    구억리에서는 '계(契)'를 '제'라 불렀다. 그래서 '계원'을 '제원'이라 했으며 제원은 보통 15명에서 20명 안팎이었다. 제원은 누구든지 될 수는 있었으나 가계가 어렵고 생활이 곤란한 서민층에서는 한 동네에 꾸준히 주거하기도 힘들었고 농사일과 '제'일을 동시에 볼 수 없었기 대문에 제이 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계원이 되기 위한 특정한 요건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릇을 만드는 도공들은 육지부에서는 옹기 작업의 특성상 천민 취급을 받아왔고 조선조 말기 이후 일제 강점기의 옹기장 이들에 대한 사회적 천시가 여전하여 사회적 냉대와 가난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구억리에서는 오히려 농사만 짓는 경우보다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업으로 옹기를 생산한 경우가 옹기 생산업만을 전문적으로 한 경우보다 많아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육지부에서처럼 하층민 대우는 받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가난한 서민(농사조차 지을 경지가 없는 소농이거나 병작을 하는 경우는 참여하고 싶어도)은 계원으로 참여하기가 힘들었다고 하는점으로 보아 육지부 지방과 달리 천시받는 분위기는 아닌 듯 싶다.

    가마의 축조

    제주 옹기 가마의 가장 큰 특징은 가마가 '돌'로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제주의 돌은 화산 폭발에 의한 용암석으로서, 다공질이고 돌 자체가 내화재 역할을 하였다.

    흙 제품을 구워냈던 가마를 제주도에서는 '굴'이라 불렀다. 기와를 구웠던 기와가마를 '기왓굴'혹은 '왯굴'이라 했으며, 항아리, 허벅, 고소리, 술 등 실생활 용기를 구웠던 옹기 가마와 토기 가마를 가각 '노랑굴'과 '검은굴'이라 했다.

    제주도 가마의축조 방법에서 가장 큰 특징은 흙과 함께 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육지부 지방에서는 흙을 이용하여 토석을 만들어 사용했지만 제주에서는 다공질의 현무암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렇다고 모든 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명 '해량도'이라고 하여 해안 지역에 분포하는 현무암을 이용했다. 화산 폭발에 의한 용암석인 현무암은 이미 한번 구워진 상태이며 다공질이기 때문에 내화재로서 훌륭한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노랑굴은 대부분 자연 경사를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이때 자연 경사각도(18도) 그 자체가 굴뚝 역할을 하여 불길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경사 각도가 급하면 불길이 잘 빠져서 열 손실이 많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낮게(15~20℃정도 안팎) 설치했다.

    굴을 축조할 경우 굴의 입지 선택은 굴의 자연 경사와 주변의 연료 조건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유지와 마을 공유지를 구별하지 않았다. 비록 사유지에 굴을 박게 되더라도 지가를 지불하지 않고 기증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사유지를 제공한 주인이 가마를 사용했을 경우에 굴 삯을 안받는 특혜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들을 고려한다면 구억리의 옹기 입지는 원료(연료)지향형 입지라고 할 수 있다.